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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글

                   (산새소리)

 

'길’은 사람들이 정말 자주 쓰는 흔한 말입니다.

 

나는 이상하게 이 한 글자 단어가 오래전부터 참 좋았습니다.

 

그 어감이 입에 착 감깁니다. 긴 세월 참 친구처럼 다정하게 긴 여운을 줍니다.

 

 

에움길

이 뜻을 모르는 이도 많을 거 같습니다. ‘빙 둘러서 가는 멀고 굽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둘레를 빙 둘러 싸다는 동사 에 우다에서 나왔습니다.

 

지름길은 질러가서 가까운 길이고, 에움길은 에둘러 가서 먼 길입니다.

 

은 순수 우리말입니다.

한자를 쓰기 전부터 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라 향가에도 나옵니다. 길을 칭하는 말들은 거개가 우리말입니다.

 

그런데 길 이름에는 질러가거나 넓은 길보다 돌아가거나 좁고 험한 길에 붙은 이름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 인생사처럼 말입니다.

 

집 뒤편의 뒤안길,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 고샅(),

꼬불꼬불한 논두렁 위로 난 논틀길,

거칠고 잡풀이 무성한 푸서릿 길,

좁고 호젓한 오솔길,

휘어진 후밋길,

낮은 산비탈 기슭에 난 자드락길,

돌이 많이 깔린 돌서더릿 길이나 돌너덜길,

사람의 자취가 거의 없는 자욱길,

강가나 바닷가 벼랑의 험한 벼룻길

 

 

숫눈길을 아시나요?

눈이 소복이 내린 뒤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그대의 첫 발자국을 기다리는 길입니다.

 

이란 단어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참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사유적입니다.

 

도로거리가 주는 어감과는 완전 다릅니다.

 

은 단순히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길이 없다거나 내 갈 길을 가야겠다라는 표현에서 보듯 길은 삶에서의 방법이거나 삶 그 자체입니다.

 

영어 ‘way’‘street’와 달리 같은 중의적 의미를 갖습니다. 서양 사람들도 길에서 인생을 연상하는구나 싶어 신기했습니다.

 

불교나 유교, 도교 등 동양 사상에서의 공통적 이념도 도()라고 부르는 길입니다.

 

우리는 평생 길 위에 있습니다.

누군가는 헤매고, 누군가는 잘못된 길로 가고, 누구는 한 길을 묵묵히 갑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탄탄대로가 있으면 막다른 골목도 있습니다.

 

 

세상에 같은 길은 없습니다.

나만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프랭크 시내트라에게는 “Yes, it was my way”였고 “I did it my way”였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이들은 그 유명한 흑백 영화 ’(La Strada 1954)을 기억할 것입니다.

 

야수 같은 차력사 잠파노(안소니 퀸)과 순진무구한 영혼을 가진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는 평생 서커스 동반자로 길을 떠돕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기가 버린 젤소미나의 죽음을 알고 잠파노는 짐승처럼 울부짖습니다.

 

길이 끝나는 바닷가에서입니다. 애절하게 울려 퍼지는 니노 로타의 그 유명한 트럼펫 연주 테마 음악영화와 제목이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명시 가지 않은 길에서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길은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도 존재하지만 떠나기 위해서도 존재합니다.

 

길을 간다라는 말보다 길을 떠난다는 말은 왠지 낭만적이거나 애잔하거나 결연합니다.

 

결국 우리는 길 위에서 길을 물으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입신양명의 길이거나, 고행의 길이거나, 득도의 길이거나, 산티아고 길이거나,

바이칼 호수의 자작나무 숲길이거나, 동네 둘레길이거나 ~~

 

우리네 인생이 곧 길이요, 우리의 발이 삶입니다.

 

결국은 마이 웨이를 가는 겁니다.

지름길을 택할 것인가, 에움길로 돌아서 갈 것인가.

 

 

인생길은 결국은 속도와 방향의 문제입니다.

 

지름길로 가면 일찍 이루겠지만 그만큼 삶에서 누락 되고 생략되는 게 많을 것입니다.

 

에움길로 가면 늦지만 많이 볼 것입니다.

 

꽃구경도 하고, 새소리 바람 소리도 듣고, 동반자와 대화도 나눌 것입니다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모든 사랑은 차표 한 장으로 쉽게 가는 지름길이 아니고, 수만 갈래의 에움길을 돌고 돌아서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 사랑의 신산함을 에움길로 묘사한 명시가 있습니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나희덕 님의 시, ‘푸른 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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